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프 폭동 (문단 편집) == 진행 == > "국군은 국군을 향해 총을 쏘지 않습니다.([[Reichswehr]] schießt nicht auf [[Reichswehr]])" > - [[한스 폰 젝트]],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반란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해 왔지만 정부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국방장관 노스케가 군부들에게 진압을 '요청'[* 명령이 아니라 요청이었다. 당시 독일에는 [[문민통제]]라는 [[개념]]이 없었고 다만 정치와 군대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을 뿐이다.]했지만 군부는 '같은 독일군끼리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이를 거부했다. 다음날인 13일 새벽 반군이 베를린 시내로 돌입하기 시작했고 내각 구성원들은 황급히 베를린 밖으로 대피해야만 했다. 13일 아침 반군은 마침내 베를린 전역을 장악했고 카프는 스스로 국가수상(Reichskanzler)직에 올랐음을 선포했다. 실질적으로 반란을 주도한 뤼트비츠에게는 국방부 장관직이 주어졌다. 군부가 새로 수립된 내각에 지지를 표했고 [[바이에른]]에서도 반란에 지지를 표명했다.[* 다른 지역은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고 일단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간잽이~~] 에베르트가 이끌던 기존 내각은 반군을 피해 [[드레스덴]]을 거쳐 멀리 [[슈투트가르트]]로 피신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독일 전역의 노동자들에게 반란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실시할 것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군부보다는 사민당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았던 노조는 정부의 호소를 듣자마자 곧바로 파업에 들어갔고 심지어 사민당과 앙숙이었던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1차대전을 적극 지지한 사민당 주류에 반발하여 새로 성립된 정당이다.]과 [[독일 공산당]]까지도 파업에 동조하던 상황 속에서 1200만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실시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독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으로 남아 있다.] 3월 15일에는 사실상 독일 전역이 올 스탑되었다. 반군 측은 당황해서 노동자들을 달래기도 하고 위협해 보기도 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고 결국 3월 17일 쿠데타는 사실상 실패로 끝닜다. 하지만 정부 역시 반군 측을 결정적으로 몰아낼 힘은 없었고 결국 다시 한 번 협상이 열렸다. [[사민당]], [[가톨릭 중앙당|중앙당]], [[독일인민당]]과 같은 주요 정당 및 군부가 참여한 협상에서 카프와 뤼트비츠가 수립한 내각을 붕괴시키는 대신 젝트 장군을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재선거의 실시 등을 골자로 하는 절충안이 결정되면서 마침내 반란은 끝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